선교의 이름으로 침묵하다: 방글라데시 의료 선교 성범죄 은폐 사건

선교의 이름으로 감춰진 권력, 침묵, 그리고 조직의 실패
1960년대부터 1980년대 말까지 방글라데시 선교지에서 활동한 한 미국인 의료 선교사의 연쇄 성범죄와 그에 대한 조직적 은폐가 2010년대에 이르러서야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종교 조직의 구조적 문제와 권력의 남용이 어떻게 피해자를 침묵시키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가해자는 미국 보수 침례교계 선교단체 소속 외과의사 선교사 던 케첨(Donn Ketcham)입니다. 그는 1961년부터 1989년까지 방글라데시 남부 말룸가트(Malumghat) 선교병원에서 활동했습니다. 해당 선교병원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본부를 둔 복음주의 침례교 선교 기관 ABWE(Association of Baptists for World Evangelism)가 운영하던 곳입니다.
1. 범죄의 구조: ‘의사’이자 ‘선교사’라는 이중 권력
케첨은 의료 선교사라는 지위를 활용해 환자와 선교사 자녀들에게 접근했습니다. 2016년 독립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자는 최소 22명 이상입니다. 어린 소녀 18명과 성인 여성 4명 이상이 포함되며, 상당수는 선교사 자녀(MK, missionary kids)였습니다. 피해 아동은 8세에 불과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는 진료를 빙자해 불필요한 골반·가슴 검사를 실시했고, 일부 사례에서는 마취제인 케타민을 사용해 피해자를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든 뒤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증거도 확인되었습니다. 피해자 다수는 장기간 반복적 학대를 경험했으며, 성인이 된 이후에도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렸습니다.
이 사건의 핵심은 단순한 성범죄가 아니라 ‘권력의 비대칭성’입니다.
- 그는 의사였습니다.
- 그는 선교사였습니다.
- 그는 조직 내에서 명망 높은 인물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권력은 피해자가 문제 제기를 하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를 형성했습니다.
2. 1989년: 드러났지만, 드러나지 않은 사건
1989년, 14세 선교사 딸에 대한 성추행 및 성관계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의 범죄는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사건은 외부로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ABWE 방글라데시 지부 지도부는 현지 사법기관에 신고하지 않았고, 공개적 징계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케첨을 미국으로 송환해 조용히 사직 처리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였습니다.
피해 소녀는 “부적절한 관계”였으며 “피해자도 일부 책임이 있다”는 취지의 압박을 받았습니다. 결국 거짓 자백 편지까지 작성하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명백한 책임 전가이자 조직적 회피입니다.
범죄자는 처벌받지 않았고, 피해자는 침묵을 강요당했습니다.
3. 조직적 은폐: 개인이 아닌 시스템의 문제
조사에 따르면 1980년대 중반 이미 케첨의 부적절한 행실을 의심하는 내부 제보가 있었습니다. 1985년에는 관련 문건이 동료 선교사에 의해 제거·소각되었다는 증언도 나왔습니다. 이는 조직 내부에서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1989년 사건 이후에도 미국 사법당국에 신고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케첨은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의사 면허를 유지하며 미시간 주에서 의료행위를 계속했습니다. 지역 교회에서는 ‘은퇴 선교사’로 존경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조직은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았고, 가해자의 명성과 기관의 평판을 보호했습니다.
4. 2011년: 피해자들의 폭로
사건이 다시 세상에 드러난 것은 2011년입니다. 과거 피해자들이 온라인 블로그 ‘Bangladesh MKs Speak’를 통해 집단 폭로를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용기 있는 고발로 언론과 교계에 큰 충격이 확산되었습니다. 그제서야 ABWE는 독립 조사를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초기 조사 과정에서도 외부 기독교 학대대응 단체와 갈등을 빚으며 계약을 해지하는 등 진상 규명은 지연되었습니다.
결국 3년에 걸친 조사 끝에 2016년 최종 보고서가 발표되었습니다.
200여 명 인터뷰와 14,000쪽 문서 검토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 다수의 경고 신호가 있었음에도 지도부가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 1989년 사건에서 피해자를 ‘동의한 관계자’로 왜곡했습니다.
- 조직 평판을 우선시하는 의사결정이 반복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관리 실패가 아니라, 구조적 윤리 실패입니다.
5. 뒤늦은 사과와 한계
보고서 발표 이후 ABWE 이사회는 공식 사과를 발표했습니다. 일부 지도자들을 해임했고, 피해자 상담 지원과 아동보호 정책 강화를 약속했습니다. 리더십 교육 의무화와 신고 시스템 개선도 도입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점’입니다.
- 범죄 발생: 1960~80년대
- 1차 문제 제기: 1989년
- 공개 폭로: 2011년
- 독립조사 보고서 발표: 2016년
정의는 수십 년 동안 지연되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피해자들은 혼자 고통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6. 이 사건이 남긴 질문
이 사건은 단지 한 선교 단체의 과거 문제가 아닙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 종교 조직은 왜 내부 문제를 외부로 공개하지 않으려 하는가?
- ‘사역’과 ‘하나님의 일’이라는 명분이 어떻게 책임 회피의 방패가 되는가?
- 조직 충성 문화는 왜 피해자를 침묵시키는가?
- 우리는 권위 있는 인물의 도덕성을 얼마나 쉽게 전제하는가?
권위와 신앙은 면책 특권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높은 책임을 요구합니다.
결론
방글라데시 의료 선교사 성범죄 은폐 사건은 개인의 범죄가 조직의 침묵과 만나 어떻게 구조적 폭력이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피해자들이 입을 열기 전까지 조직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의 진짜 교훈은 단순히 “재발 방지”가 아닙니다.
투명성과 외부 감시, 권력 분산, 그리고 피해자 중심 접근이 없는 조직은 언제든 같은 실패를 반복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정의는 시간이 지난 뒤에도 가능하지만, 지연된 정의는 또 다른 폭력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조직의 명예보다 인간의 존엄을 우선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