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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움” 뒤에 숨은 침묵과 공모 – 로마 교황청 신학생 성범죄 유죄 판결을 둘러싼 진실

가을 카푸치노 2025. 8. 24. 19:20

2013년 3월 14일 가브리엘 마르티넬리가 시스티나 성당에서 당시 새로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첫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출처: 바티칸 미디어, WP 캡처)출처 : 천지일보(https://www.newscj.com)

 

 

 

   2021년, 로마 교황청에서 전례 없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바티칸 시국 안에서 일어난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에 대해 교황청 사법부가 처음으로 형사 재판을 열고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지만 동시에 가장 강력한 종교 권력을 지닌 이곳에서, ‘신의 사람’들이 저지른 범죄가 법정에 서게 된 건 그 자체로 이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단지 "역사적인 판결" 정도로 받아들이기엔, 그 안에 담긴 현실은 훨씬 더 냉혹합니다.

 

   ‘예비성직자 학교’라는 명목 아래 벌어진 성폭력

 

   사건은 바티칸에 위치한 성 피오 10세 예비신학교에서 발생했습니다. 이곳은 교황의 미사에서 복사를 맡을 청소년들을 교육하는 곳으로, 종교적 엄숙함과 위계가 극대화된 환경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공간에서, 선배 신학생이자 훗날 사제로 서품된 가브리엘레 마르티넬리 신부가 동료 후배인 L.G.에게 수년간 성적 학대를 저질렀다는 폭로가 나왔습니다.

    피해자는 당시 수차례 도움을 요청했지만, 책임자인 엔리코 라디체 신부는 이를 묵살했습니다. 문제는 이 구조가 단지 한 신부의 무책임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교회 조직 전체의 침묵, 방조, 은폐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2017년 언론 보도로 이 사건이 외부에 알려진 뒤에야 교황청은 뒤늦게 수사에 착수했고, 2019년 말 마르티넬리와 라디체를 기소하며 재판이 시작됐습니다.

 

   1심 판결: “저항하지 않았으니 강간이 아니다”?

 

  2021년 10월, 약 1년에 걸친 1심 재판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마르티넬리 신부에게 무죄.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1. 2008년 이전의 성적 행위는 당시 가해자가 16세 미만의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다.
  2. 이후의 행위에 대해서도 **강제성(폭행 또는 협박)**이 명확히 입증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5년 동안 여러 차례의 “성적 접촉”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명백한 강요에 의한 범죄라고 보기엔 증거가 부족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다시 말해,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으니 강간이 아니라고 본 셈입니다.

   이런 판결은 성범죄에 대한 구시대적 인식이 아직도 교황청 내부 사법 시스템에 깊이 뿌리내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항소심: 유죄지만, 여전히 미적지근한 정의

 

  교황청의 검찰격인 Promoter of Justice는 즉각 항소했고, 2024년 1월 항소심 재판부는 일부 판결을 뒤집고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마르티넬리는 ‘미성년 부패죄’가 인정되어
▶ 징역 2년 6개월
▶ 벌금 1,000유로를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 유죄로 인정된 기간은 2008년 8월부터 2009년 3월까지, 단 7개월뿐.
  • 강간 등 가중처벌이 따르는 혐의는 여전히 증거 불충분으로 인정되지 않았음.
  • 법정구속도 없었고, 교회는 단지 그의 사목 활동만을 제한했을 뿐.

  결국 성직자의 이름으로 오랜 시간 반복된 범죄에 대해, 사법과 종교 권력은 또다시 최소한의 책임만을 물었습니다.

 

  진짜 문제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다

 

  이 사건을 단지 개인의 도덕적 타락이나 일회성 범죄로 보는 시선은 매우 위험합니다.
마르티넬리의 범죄는 권위 중심의 종교 시스템, 성역화된 위계, 조직적 침묵 속에서 가능했고, 또 그렇게 오랜 시간 은폐되었습니다.

  책임자인 라디체 신부는 공소시효와 증거 불충분으로 처벌조차 받지 않았고, 교회는 어떤 공식적인 내부 조사 결과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성직자도 인간”이라는 말로 정당화될 수 없는 구조적 문제가 명백하게 존재합니다.

 

  성스러운 척 하지 마라

 

   이 사건은 우리가 종교, 특히 가톨릭 교회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 종교란 이름으로 세워진 조직이, 과연 피해자의 편에 서고 있는가?
  • 수많은 은폐와 침묵 속에서 ‘신의 대리자’라는 명칭은 여전히 유효한가?

  결국 이 사건은 늦게나마 가해자에게 책임을 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그 책임의 방식과 크기가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진정한 정의는 단순한 법적 판결이 아니라, 피해자의 삶과 신뢰가 복원되는 과정 속에 있어야 합니다.

 

  종교가 종교답지 못할 때, 피해자는 늘어진다

 

  피해자는 이미 성직자의 길을 떠났습니다.
“종교답지 않은 종교” 안에서, 더는 신의 이름을 붙들고 버티는 것이 무의미했을지도 모릅니다.

교회는 이제 선택해야 합니다.
  침묵과 면피로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진정한 개혁과 책임의 길로 나설 것인지.

‘신의 집’이 더 이상 고통을 은폐하는 장소가 되어선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 집이 진짜로 신을 위한 공간인지, 권력을 위한 성역인지 끝까지 묻고 또 물어야 할 때입니다.